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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오탁번-

고운남 2010. 1. 8. 12:05

 

 

 

 폭설(暴雪)/ 오탁번


삼동(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南道)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天地)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行星)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宇宙)의 미아(迷兒)가 된 듯 울부짖었다

―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 계간『시향』2006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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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 대구엔 올 겨울 들어 첫눈이자 새해 출근 첫날 서설이 내렸다. 이만해도 제법 눈다운 눈이고 겨울 서정을 부추기는 데엔 부족함이 없는데도 내심 이왕 내릴 거면 좀 오지게 와 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웬걸? 서울지방엔 1937년 적설관측 이래 최대의 폭설이 내렸다고 한다. 뉴스는 기상특보를 알리면서 곳곳의 마비된 교통과 엉금엉금 기어가기도 힘들어 길바닥에 주저앉은 자동차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쯤되면 자동차 보다 썰매가 더 유효하지 싶고 실제로 도심에서 스키를 탄 작자들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시와 농담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유쾌하게 읽히는 이 시처럼 가볍지도 않고 무겁지도 않게 기왕의 눈 속에 파묻혀볼 일이다. 까짓거 울다가 웃다가 몽땅 좆돼버려도 문정희 시인의 ‘한계령을 위한 연가’나 부르면서 ‘오오 눈부신 고립’에 한번 묶여보는 거다.

 

 

ACT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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