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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애도시대 이야기

고운남 2010. 10. 9. 17:50

 

  일본 에도시대 이야기


임진왜란이 끝난 후 시작된 에도시대에는 오늘날 일본을 규정하는 전통 가치관들의 정형화가 이루어졌다. 에도시대는 일본인들의 가슴 속에서 '과거'라는 아스라한 추억을 되살려 준다. 일본에서 사극에 해당하는 시대극은 주로 에도시대를 많이 다루고 있다. 일본인의 마음의 고향이라 볼 수 있는 에도시대의 주요한 역사사건을 살짝 이야기하고 지나가겠다.


에도시대의 주인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늘날 나고야 부근인 미카와 지방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인근지역을 호령하고 있던 이마카와씨에게 인질로 보내졌다. 인질생활을 하면서 커다란 인내심을 기르게 되었고 이는 일본을 통일하고 정권을 차지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점차 세력을 신장시킨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고향에서 가까운 오와리에서 세력을 키워 일본을 호령했던 무장 오다 노부나가와 연합했다. 이후 지금의 도쿄 인근지역인 간토오지방에서 세력을 떨치던 고호죠씨를 멸망시켜 이 지역에 대한 지배를 시작했다. 그런데 당시 오다 노부나가가 부하에게 암살당한 후 권력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기울었는데, 그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신하로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받들었다.

그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가신들에게 나누어 줄 영지를 마련하기 위해 대륙침략을 계획하고 조선공격을 시작했다. 그때 일본 전국의 다이묘들은 병력의 징발을 명령받았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간토오지방의 빈곤함을 이유로 병력 소집에 응하지 않았다. 이후 7년간 히데요시 휘하의 군대는 조선과의 전쟁으로 커다란 피해를 입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의 세력을 온존시킬 수 있었다. 히데요시의 죽음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을 놓고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와 일대 결전을 벌였다. 결국 1603년 세키가하라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게 되어 일본의 최고권력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에 바쿠후를 설치하여 일본의 실질적인 수도로 삼고, 가장 먼저 에도를 수도에 걸맞게 바꾸는 일부터 시작하였다. 이를 위해 도쿠가와는 다이묘들과 부하들에게 부근의 간척사업을 명령하였다. 그 결과 바닷물이 들어오던 에도성 주변은 새로운 토지로 탈바꿈하였고 오늘날 도쿄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에도성의 건설사업은 이에야스의 손자인 도쿠가와 이에미츠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에도성의 흔적

일본의 성에는 덴슈가쿠라는 독특한 건축물이 있는데, 현재에는 그 덴슈가쿠의 자취인 덴슈다이만이 남아있다. 돌로 쌓아 올린 덴슈다이는 동서 33m, 남북 30.6m에 높이 18m이다. 기록에 따르면 에도성의 덴슈가쿠는 5층건물로 높이는 50m 정도의 규모였다고 한다.


화재로 없어진 덴슈가쿠 대신 고쿄히가시교엔의 남쪽에 있는 후지미야구라가 덴슈가쿠의 역할을 대신했다고 한다. 후지미야구라는 개방되어 있지 않으므로 가까이서 볼 수 없고 멀리서 바라보기만 할 수 있다. 후지미야구라에서 왼쪽으로 나 있는 길은 마츠노로카가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마츠노로카는 주군의 죽음에 대한 무사들의 복수사건을 그린 쥬신쿠라의 발단이 되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한편 이 쥬신쿠라는 요즘도 일본 영화나 드라마, 가부키 등의 유명한 소재로 많이 다뤄지는 이야기다.



쥬신쿠라 이야기

주신쿠라는 일본인들의 마음 속에 있는 '무사도'를 가장 잘 그린 소설이다.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주인의 원수를 갚는 무사들의 이야기다. 무사는 전쟁이 벌어지면 주군의 휘하에서 공을 세우는 것을 직업으로 한다. 하지만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전쟁은 사라지게 되었고 반란을 두려워한 에도바쿠후는 지방제후들의 세력을 줄이는데 힘을 모았다. 지방영주들이 문제를 일으키면 영주를 할복하도록하여 가문을 없애는 정책을 펴나갔다. 이런경우 할복당한 영주의 휘하에 있던 무사들은 순식간에 직업을 잃어버린다. 또한 두 주군을 섬기지 않는다는 당시의 덕복으로 무사들은 '로닌'이 되어 에도시대의 불만세력이 되었다.

에도성은 도쿠가와바쿠후의 최고 실력자인 쇼군이 거주하는 곳이다. 신성함을 강조하여 에도성안에서는 어느 누구라도 칼을 뽑을 수 없었고 이를 어긴 자에게는 죽음을 내렸다. 1701년 소금의 명산지로 알려진 히로시마 부근의 아코오한의 한슈였던 아사노 나가노리에게 교토의 조정에서 내려온 칙사를 접대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바쿠후는 칙사접대에 대한 각종 의례를 지도할 사람으로 대대로 행사를 전문적으로 담당해 온 기라 요시나카를 지명했다. 뇌물이 성행하던 시대에도 청렴한 무사도를 강조하던 아사노 나가노리는 기라 요시나카에게 칙사를 맞이하기 전에 아무런 뇌물을 보내지 않았다. 그 결과 기라는 아사노의 접대를 사사건건 간섭함으로써 아사노에게 무사로서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의 모욕을 주었다. 이에 아사노는 기라에게 당한 치욕을 참지 못하고 에도성의 '마츠노로카'에서 칼을 빼들었다가, 주위의 만류로 진정되었다. 하지만 아사노는 바쿠후의 쇼군이 거주하는 곳에서 칼을 빼들었다는 죄로 바쿠후로부터 할복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것을 마츠노로카 사건이라고 한다.

그때 바쿠후는 싸움을 한 경우 양측을 모두 처벌한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래의 규칙을 지키지 않고, 기라에게 따로 벌을 내리지 않았다. 따라서 아코오측 무사들은 반발하게 되고, 11년 후 아코오한 47명의 무사들이 기라의 저택을 습격하여, 기라의 목을 베어 돌아가신 주군의 뵤지에 올렸다. 그리고나서 센가쿠지에서 바쿠후의 처분을 받아들여 전원 할복 자살했다. 이 사건이 다뤄진 소설이 쥬신쿠라이다. 이 쥬신쿠라는 일본인의 기본적인 정서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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