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생돌쭌
풍운지회(風雲之會) : 구름과 바람의 만남을 말한다. 본문
풍운지회(風雲之會) : 구름과 바람의 만남을 말한다.
다산 정약용은 실학자로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강진 유배지에서 18년 동안 귀양살이 하면서
자기를 모함한 몇 사람만 불편한 얘기를 조금 했을 뿐 국가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 언급도 원망도 하지 않았고 평생 나라와 백성 걱정을 하였다.
관료들의 부패 척결에 500여 권의 저술을 통해
정치, 행정, 법학, 경제, 지리, 의학, 공학 등을 아우르는 대 저작을 집필하시고 75세에 생을 마쳤다.
성호 이익 선생의 유고집을 읽고 실학에 꿈을 키운 다산 정약용 선생
250주년을 맞이하여 유네스코 2012년에 세계기념 인물로 네 사람을
선정하였는데 한국 최초로 다산 정약용 선생이 등재되었다.
1)루소
2)헤르만헤세
3)드뷔시
4)다산 정약용
이런 사실을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다산 선생의 탄생은 영조가 자식인 사도세자를 6월에 뒤주에 죽인 얼마 후
음력 6월 16일(양력 8월5)일에 아버지 하석 정재원(荷石 丁載遠)
어머니 해남 윤씨(海南 尹氏) 사이에서 출생했다.
어머니는 고산 윤선도 후손이다.
태어난 곳은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이다.
다산 정약용 나이 9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뜨고 말았다.
영조가 자식을 비참하게 죽인 현실을 보면서 관직을 내려놓고
너는 정치를 하지 마라 하고 농사나 지으라 하며
다산 아명을 귀농(歸農)이라고 지었다.
다산을 얘기하려면 정조를 얘기 안 할 수 없다.
조선시대에 전국에서 초시는 1,000명을 진사는 200명을 합격시켰는데
다산은 22세에 진사에 합격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갖추었다.
초시만 합격하여도 대단한데 진사에 합격하면 가문에 영광이었다.
진사 합격자는 임금님께 인사를 드리는데, 정조는 조선왕조에 최고의 대학자였다.
다산 주관식 논문을 읽고 인재로 키워야 되겠다고 이미 생각을 하였다.
정조와 처음 만남에서 딱 두 마디를 나누었다.
너 이름이 무어냐? 네! 정약용입니다.
나이가 몇이냐? 22살입니다. 알았다.
이 첫 만남을 다산 기록에 풍운지회(風雲之會) 구름과 바람의 만남이라고 하였다.
정조는 성균관 학생들에게 수시로 시험을 치렀는데
다산이 계속 일등을 하니 감탄하며 학생인 다산을 수시로 불러 국가정책에 대해
물어보고 하였는데 다산이 올린 정책 여러 개가 국정에 반영 되기도 하였다.
6년의 성균관 공부를 마치고 28세에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들어서면서
첫날 지은 詩가 있는데 공직자로서 공렴(公廉)이란 두 글자를 마음에 다짐을 하였다.
이 다짐은 평생 동안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33세에 암행어사로 경기북부 4개 고을을 암행 감찰하였는데
농촌 백성들의 황폐하고 비참한 생활과 관료들의 부패에 충격을 받고
이대로 두고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겠다 생각하며 결심을 한다.
정조 아들 순조가 5살 되던 해 당시 30세인 다산에게
10년을 계획하고 나중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된 수원 화성 건축을 지시한다.
다산은 설계를 하고 도르래 원리를 생각하며 "거중기"를 발명하여
11대를 투입 2년 4개월 만에 완공하니 정조가 감탄하였다.
그런데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이 너무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10년만 더 살았어도 조선의 역사는 분명 바뀌었을 것이고 다산과 정조의
개혁 정책으로 유토피아 시대가 열리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옮긴 글)
'좋은글(いいぶんしょう)'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한민국 이 대한민국인 이유 (0) | 2024.08.21 |
---|---|
어떤 대한민국을 만들 것인가? (0) | 2024.08.19 |
다산과 정조의 만남(풍운지회-風雲之會 (0) | 2024.08.19 |
인생은 부메랑이다 (0) | 2024.08.18 |
부자의 품격&지도자 품격 (0) | 2024.08.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