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생돌쭌
부자의 품격&지도자 품격 본문
79주년 광복절을 맞아
어제에 이어 감히 민족기업가이자 교육자이며 독립운동가인 유일한 박사의 생을
간략하게 소개하며 그를 추모합니다.
≪ 유년의 유학과 성장 ≫
유일한은 1895년 1월 15일 평양부에서 상업을 하는 부모님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1904년, 독실한 개신교 신자인 아버지는
미국 감리교에서 조선인 유학생을 선발한다는 말을 듣고,
9살에 불과한 아들 유일한을 미국으로 유학을 보냅니다.
유일한이 식견을 넓혀서 장차 민족을 위해 일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큰 돈을 들여 유학을 보낸 것입니다.
배에서 아버지가 환전해준 미국 돈을 잃어버린 유일한은
미국 네브래스카주에서 살던 태프트 자매에게 입양되었고,
독실한 침례교회 신자인 이들 자매는 근면 성실하고 검소한 삶을 실천했으며,
어린 유일한이 영어를 배워 미국 사회에 적응하도록 도왔습니다.
그는 낮에는 농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했으며,
방학 때는 신문배달을 하면서 자신의 힘으로 살았습니다.
고등학교부터 미식축구를 하였던 그는 미시간 대학교에서도 미식축구 선수로 활약하였습니다.
뛰어난 체격과 운동 실력으로 장학금을 받으며 학업과 운동을 병행하였고,
이후 미시간 주립 대학교 대학원, 스탠퍼드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법을 공부하였습니다.
≪ 조국의 이름으로 개명 ≫
유일한의 원래 이름은 ‘유일형’이었는데,
신문배달을 할 때 보급소 직원이 일형이라는 발음을 힘들어하자 이를 계기로
아버지께 편지로 승낙을 받고 조국 한국을 기억하자는 의미로 이름을 일한(韓)으로 바꾸었습니다.
≪ 결혼과 귀국 ≫
1922년, 미국에서 숙주나물 통조림 회사를 설립하여 번창하였고
소아과 의사인 중국계 호미리 여사와 결혼하였습니다.
1926년, 연세대학교 상과 교수를 제의 받은 유일한은
세브란스병원 소아과 과장을 제의 받은 부안과 함께 귀국하였습니다.
≪ 유한양행 창업과 윤리경영 ≫
귀국 후 가족을 만나기 위해 방문한 북간도를 방문한 그는
질병과 기아로 고생하는 가족과 동포들의 참혹한 실상을 보게 되었고 이들을 질병으로부터 구제하고자 유한양행을 설립했습니다.
유한양행이 처음 개발하여 판매한 제품이 전설의 만병통치약 ‘안티푸리민’입니다.
항상 검소하게 생활하며 정치권과는 거리를 두었던 당시 정권 실세의 눈 밖에 났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부정부패 단속을 위해 탈세 기업을 때려잡겠다고 하였지만,
실제는 정치자금을 받고 기업에게 특혜를 주거나 뒤를 봐주는 상황이었습니다.
정치자금 제공을 거절한 유한양행은 국세청의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몇 차례나 받았지만,
법인세를 꼬박꼬박 납부하하였을 뿐만 아니라, 굳이 내지 않아도 될 세금까지 자진납세한 사실만 밝혀져
‘털어도 털어도 먼지가 나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쯤 되자 처음에는 발톱을 세우고 덤볐던 박정희 정권도
오히려 유한양행을 모범납세법인으로 선정하여 1968년 동탑산업훈장을 수여하였습니다.
1969년 회사 중역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미국에서 변호사를 하던 아들 유일선을 유한양행 부사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러나 국민의 건강과 공공의 이익을 우선하는 유일한의 신념과
기업의 성장에 초점을 맞춘 아들의 의견이 충돌하자
즉시 아들을 해고하고 이후로는 일가 친척은 일절 경영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그후 경영 일선에서 은퇴하며 전문경영인(CEO)에게 유한양행의 경영권을 인계하였는데,
이는 사실상 국내 최초라고 하며 유한양행의 전문경영인 제도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으며
전문경영인 또한 모두 평사원부터 시작한 내부승진으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 사재를 턴 인재양성 ≫
그는 일제강점기에도 항상 “우리 민족이 일본인보다 못하지 않다.”고 강조하였으며
6.25 전쟁으로 온 나라가 잿더미가 되자 국가를 재건할 인력을 키우기 위해
1952년 고려공과기술학교를, 1964년 유한공고를, 1970년 유한재단과 유한공업전문대학(현 유한대학을) 설립하였습니다.
또한 전부터 인연이 있었던 연세대학교에도 주식 12,000주를 기부하여
현재의 세브란스병원으로 발전하도록 큰 도움을 주었다.
≪ 드러내지 않은 독립운동 ≫
1909년, 유일한은 미국행 인솔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박용만이 만든 헤이스팅스 소년병 학교에 입학하였고,
1919년 3.1 운동 직후,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 독립운동결의문 기초작성위원으로 선임되어
대회장에서 직접 낭독하기도 하였고, 1941년 재미한족위원회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는데 이런 항일 경력 때문에 귀국 후 일본경찰에게 연행당하는 고초를 겪기도 합니다.
1942년 미국 CIA의 전신인 OSS의 한국담당고문으로 활약하며, 워싱턴 OSS가 주도한 냅코 작전 조장으로도 참가했습니다,
냅코 작전(NAPKO Project)은 일본 점령지에 최정예 특수요원을 투입하여 정보를 수집하는 고난도 극비로 임무로,
당시 유일한은 무려 50살(지금으로 치면 환갑을 훌쩍 넘을 나이)로
강도 높은 군사·첩보훈련을 받아냈지만, 히로시마 나가사끼 원폭으로 일본이 항복함에 따라 작전은 취소되었습니다.
유일한은 이 자랑스러운 사실을 살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므로
냅코작전의 전모와 공작원 명단은 유일한 사후 20년이 지나서야 밝혀져
1995년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하였습니다.
≪ 소박한 기념관 ≫
유일한의 전 재산은 전회에 설명한대로 인재양성을 위해 모두 사회에 환원하였고
유한대학에 있는 그의 기념관(WILLOW HOUSE)에는
평소 근검절약을 실천하던 그의 손때 묻은 소품 몇 가지와
생전 친분이 두터웠던 펄벅(소설 ‘대지’로 노벨문학상 수상자) 여사가 선물한 나무의자 하나가 놓여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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