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생돌쭌
귀뚜라미 울음-박형준- 본문
가을밤 귀뚜라미 울음 / 박형준
시가 써지지 않아
책상의 컴퓨터를 끄고 방바닥으로 내려와
연필을 깎는다
저녁 해가 넘어가다 말고
창호지에 어른거릴 때면
방문 앞에 앉아서 연필 칼끝으로
발뒤꿈치의 굳은살을 깎아내던
아버지처럼, 그것이 노동의 달콤함이고
그만의 소박한 휴식이었던 그 사람처럼
살아 계실 때 시골에서 쌀과 깻잎을 등에 지고
말씀 한 번 없이 내 반지하 방에 찾아오던 아버지
비좁은 방바닥에 엎드려 시를 쓰는 아들을 위해
벽을 사이에 둔 것처럼 돌아앉아
버릇처럼 발바닥의 굳은살을 떼어내던 사람
시가 써지지 않아 고개 들면
어느새 반지하의 창에 어른거리던 저녁 빛이
작고 구부정한 등에 실루엣으로 남아 있고
글씨 그만 쓰고 밥 먹거라
방해될까 봐 돌아앉지 못하고
내 등을 향한 듯한 그 사무치던 음성
밥과 같은 시
영원히 해갈되지 않으면서
겨우 배고픔만 면하게 해주던 시처럼
가을밤 귀뚜라미 울음
이제는 무디고 무디어진 연필심에서 저미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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