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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いいぶんしょう)

이형기시(詩)모음

고운남 2009. 11. 28. 09:35

 

 

 

낙화(落花)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 터에 물 고인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호 수                                             

 

어길 수 없는 약속처럼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다.

나무와 같이 무성하던 청춘이
어느덧 잎 지는 이 호숫가에서
호수처럼 눈을 뜨고 밤을 새운다

이제 사랑은 나를 울리지 않는다.
조용히 우러르는
눈이 있을 뿐이다.

불고 가는 바람에도
불고 가는 바람같이 떨던 것이
이렇게 고요해질 수 있는 신비는
어디서 오는가.

참으로 기다림이란
이 차고 슬픈 호수같은 것을
단 하나 마음속에 지니는 일이다.

 

 

 

 

폭포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을
어깨에서 허리까지 길게 내리친
시퍼런 칼자욱을 아는가.


질주하는 전율과
전율 끝에 단말마를 꿈꾸는
벼랑의 직립
그 위에 다시 벼랑은 솟는다.


그대 아는가
석탄기의 종말을
그 때 하늘 높이 날으던
한 마리 장수잠자리의 추락을.


나의 자랑은 자멸이다.
무수한 복안들이
그 무수한 수정체가 한꺼번에
박살나는 맹목의 눈보라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시퍼런 빛줄기
2억 년 묵은 이 칼자욱을 아는가.

 

 

 

 

그해 겨울의 눈                                  


그해 겨울의 눈은

언제나 한밤 중 바다에 내렸다

 

희뿌옇게 한밤 중 어둠을 밝히듯

죽은 여름의 반딧벌레들이 일제히

싸늘한 불빛으로 어지럽게 흩날렸다

 

눈송이는 바다에 녹지 않았다

녹기 전에 또 다른 송이가 떨어졌다

사라짐과 나타남

나타남과 사라짐이 함께 돌아가는

무성 영화 시대의 환상의 필름

 

덧 없는 목숨을

혼신의 힘으로 확인하는 드라마

클라이막스 밖에 없는 화면들이

관객 없는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언제나 한밤 중 바다에 내린

그해 겨울의 눈

그것은 꽃보다 화려한 낭비였다

 

 

 

 

랑겔한스 섬의 가문 날의 꿈                     

 

나 어느새 예까지 왔노라.

가뭄이 든 랑겔한스 섬

거북 한 마리 엉금엉금 기는

갈라진 등판의 소금 꽃.

 

속을 리 없도다.

실은 만리장성으로 끌려가는

어느 짐꾼의 어깨에 허옇게

허옇게 번진 마른 버짐이니라.

 

오 박토여.

반쯤 피다 말고 시들어버린 메밀 농사와

쭉쭉 골이 패인

내 손톱 밑의 반달의 고사(枯死)여.

 

가면 가는 그만큼

길은 뒤에서 허물어지나니

한 걸음 뗄 때마다 낭떠러지 하나씩 거느리고

예까지 온 길 랑겔한스 섬,

 

꿈꾸는도다 까맣게 탄 하늘.

물도 불도 그 아래선

한줌 먼지 되어 풀석거리는 승천의 꿈

랑겔한스 섬의 가문 날의 꿈이니라.

 

          ♠랑겔한스섬(랑게르한스섬Langerhans islets)

            이자 내에 섬(島) 모양으로 산재하는 내분비선 조직으로 췌도(膵島)라고도 한다.

            섬 모양으로 보이는 세포의 집단으로 1869년 독일의 병리학자 P.랑게르한스가

            발견하여 "랑게르한스섬"이라 이름 붙인 것
 



 

길                                                       
 

빈 들판이다

들판 가운데 길이 나 있다

가물가물 한 가닥

누군가 혼자 가고 있다

아 소실점!

어느새 길도 그도 없다

없는 그 저쪽은 낭떠러지

신의 함정

그리고 더 이상은 아무도 모르는

길이 나 있다 빈 들판에

 

그래도 또 누군가 가고 있다

역시 혼자다  

 

 

 

 

나뭇잎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뭇잎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 세기 전의 해적선이 바다를 누빈다.
나뭇잎만큼 많은 돛을 달고
그 어떤 격랑도 지울 수 없는
벌레 먹은 항적(抗跡) 


나뭇잎을 다시 들여다보면
나무가 뿌리채
그 밑바닥에 침몰해 있다.
파들파들 떨리는 단말마의
손짓
잎사귀들이  

 

 

 

 

비 오는 날                                       

 

오늘
이 나라에 가을이 오나보다.
노을도 갈앉는
저녁 하늘에
눈 먼 우화는 끝났다더라


한 색 보라로 칠을 하고
길 아닌 천리를
더듬어 가면...


푸른 꿈도 한나절 비를 맞으며
꽃잎 지거라
꽃잎 지거라


산 넘어 산 넘어서 네가 오듯
이 나라에 가을이 오나보다.


 

 

 

들길                                                       

 

고향은

가난하게 돌아오는 그로하여 좋다.
지닌 것 없이
혼자 걸어가는
들길의 의미...


백지에다 한 가닥
선을 그어 보아라
백지에 가득 차는
선의 의미...


아 내가 모르는 것을,
내가 모르는 그 절망을
비로소 무엇인가 깨닫는 심정이
왜 이처럼 가볍고 서글픈가.


편히 쉰다는 것
누워서 높이 울어 흡족한
꽃 그늘...
그 무한한 안정에 싸여
들길을 간다.

 

 

 

 

산                                                        
 
산은 조용히 비에 젖고 있다.
밑도 끝도 없이 내리는 가을비
가을비 속에 진좌(鎭座)한 무게를
그 누구도 가늠하지 못한다.
표정은 뿌연 시야에 가리우고
다만 윤곽만을 드러낸 산
천 년 또는 그 이상의 세월이
오후 한때 가을비에 젖는다.
이 심연 같은 적막에 싸여
조는 둥 마는 둥
아마도 반쯤 눈을 감고
방심무한(放心無限) 비에 젖는 산
그 옛날의 격노(激怒)의 기억은 간 데 없다.
깎아지른 절벽도 앙상한 바위도
오직 한 가닥
완만한 곡선에 눌려 버린 채
어쩌면 눈물 어린 눈으로 보듯
가을비 속에 어룽진 윤곽
아 아 그러나 지울 수 없다.

 

 

 

 

코스모스                                               
 

언제나 트이고 싶은 마음에
하야니 꽃피는 코스모스였다.
돌아서며 돌아서며 연신 부딪치는
물결같은 그리움이었다.


송두리째-희망도 절망도
불타지 못한 육신
머리를 박고 쓰러진 코스모스는
귀뚜리 우는 섬돌가에
몸부림쳐 새겨진 이름이었다.


그러기에 더욱
흐느끼지 않는 설움 홀로 달래어
목이 가늘도록 참아내련다.
까마득한 하늘가에
내 가슴이 파랗게 부서지는 날
코스모스는 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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