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落花)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 터에 물 고인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호 수
어길 수 없는 약속처럼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다.
나무와 같이 무성하던 청춘이 어느덧 잎 지는 이 호숫가에서 호수처럼 눈을 뜨고 밤을 새운다
이제 사랑은 나를 울리지 않는다. 조용히 우러르는 눈이 있을 뿐이다.
불고 가는 바람에도 불고 가는 바람같이 떨던 것이 이렇게 고요해질 수 있는 신비는 어디서 오는가.
참으로 기다림이란 이 차고 슬픈 호수같은 것을 단 하나 마음속에 지니는 일이다.
폭포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을 어깨에서 허리까지 길게 내리친 시퍼런 칼자욱을 아는가.
질주하는 전율과 전율 끝에 단말마를 꿈꾸는 벼랑의 직립 그 위에 다시 벼랑은 솟는다.
그대 아는가 석탄기의 종말을 그 때 하늘 높이 날으던 한 마리 장수잠자리의 추락을.
나의 자랑은 자멸이다. 무수한 복안들이 그 무수한 수정체가 한꺼번에 박살나는 맹목의 눈보라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시퍼런 빛줄기 2억 년 묵은 이 칼자욱을 아는가.
그해 겨울의 눈
그해 겨울의 눈은
언제나 한밤 중 바다에 내렸다
희뿌옇게 한밤 중 어둠을 밝히듯
죽은 여름의 반딧벌레들이 일제히
싸늘한 불빛으로 어지럽게 흩날렸다
눈송이는 바다에 녹지 않았다
녹기 전에 또 다른 송이가 떨어졌다
사라짐과 나타남
나타남과 사라짐이 함께 돌아가는
무성 영화 시대의 환상의 필름
덧 없는 목숨을
혼신의 힘으로 확인하는 드라마
클라이막스 밖에 없는 화면들이
관객 없는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언제나 한밤 중 바다에 내린
그해 겨울의 눈
그것은 꽃보다 화려한 낭비였다
랑겔한스 섬의 가문 날의 꿈
나 어느새 예까지 왔노라.
가뭄이 든 랑겔한스 섬
거북 한 마리 엉금엉금 기는
갈라진 등판의 소금 꽃.
속을 리 없도다.
실은 만리장성으로 끌려가는
어느 짐꾼의 어깨에 허옇게
허옇게 번진 마른 버짐이니라.
오 박토여.
반쯤 피다 말고 시들어버린 메밀 농사와
쭉쭉 골이 패인
내 손톱 밑의 반달의 고사(枯死)여.
가면 가는 그만큼
길은 뒤에서 허물어지나니
한 걸음 뗄 때마다 낭떠러지 하나씩 거느리고
예까지 온 길 랑겔한스 섬,
꿈꾸는도다 까맣게 탄 하늘.
물도 불도 그 아래선
한줌 먼지 되어 풀석거리는 승천의 꿈
랑겔한스 섬의 가문 날의 꿈이니라.
♠랑겔한스섬(랑게르한스섬Langerhans islets)
이자 내에 섬(島) 모양으로 산재하는 내분비선 조직으로 췌도(膵島)라고도 한다.
섬 모양으로 보이는 세포의 집단으로 1869년 독일의 병리학자 P.랑게르한스가
발견하여 "랑게르한스섬"이라 이름 붙인 것
길
빈 들판이다
들판 가운데 길이 나 있다
가물가물 한 가닥
누군가 혼자 가고 있다
아 소실점!
어느새 길도 그도 없다
없는 그 저쪽은 낭떠러지
신의 함정
그리고 더 이상은 아무도 모르는
길이 나 있다 빈 들판에
그래도 또 누군가 가고 있다
역시 혼자다
나뭇잎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뭇잎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 세기 전의 해적선이 바다를 누빈다. 나뭇잎만큼 많은 돛을 달고 그 어떤 격랑도 지울 수 없는 벌레 먹은 항적(抗跡)
나뭇잎을 다시 들여다보면 나무가 뿌리채 그 밑바닥에 침몰해 있다. 파들파들 떨리는 단말마의 손짓 잎사귀들이
비 오는 날
오늘 이 나라에 가을이 오나보다. 노을도 갈앉는 저녁 하늘에 눈 먼 우화는 끝났다더라
한 색 보라로 칠을 하고 길 아닌 천리를 더듬어 가면...
푸른 꿈도 한나절 비를 맞으며 꽃잎 지거라 꽃잎 지거라
산 넘어 산 넘어서 네가 오듯 이 나라에 가을이 오나보다.
들길
고향은 늘 가난하게 돌아오는 그로하여 좋다. 지닌 것 없이 혼자 걸어가는 들길의 의미...
백지에다 한 가닥 선을 그어 보아라 백지에 가득 차는 선의 의미...
아 내가 모르는 것을, 내가 모르는 그 절망을 비로소 무엇인가 깨닫는 심정이 왜 이처럼 가볍고 서글픈가.
편히 쉰다는 것 누워서 높이 울어 흡족한 꽃 그늘... 그 무한한 안정에 싸여 들길을 간다.
산 산은 조용히 비에 젖고 있다. 밑도 끝도 없이 내리는 가을비 가을비 속에 진좌(鎭座)한 무게를 그 누구도 가늠하지 못한다. 표정은 뿌연 시야에 가리우고 다만 윤곽만을 드러낸 산 천 년 또는 그 이상의 세월이 오후 한때 가을비에 젖는다. 이 심연 같은 적막에 싸여 조는 둥 마는 둥 아마도 반쯤 눈을 감고 방심무한(放心無限) 비에 젖는 산 그 옛날의 격노(激怒)의 기억은 간 데 없다. 깎아지른 절벽도 앙상한 바위도 오직 한 가닥 완만한 곡선에 눌려 버린 채 어쩌면 눈물 어린 눈으로 보듯 가을비 속에 어룽진 윤곽 아 아 그러나 지울 수 없다.
코스모스
언제나 트이고 싶은 마음에 하야니 꽃피는 코스모스였다. 돌아서며 돌아서며 연신 부딪치는 물결같은 그리움이었다.
송두리째-희망도 절망도 불타지 못한 육신 머리를 박고 쓰러진 코스모스는 귀뚜리 우는 섬돌가에 몸부림쳐 새겨진 이름이었다.
그러기에 더욱 흐느끼지 않는 설움 홀로 달래어 목이 가늘도록 참아내련다. 까마득한 하늘가에 내 가슴이 파랗게 부서지는 날 코스모스는 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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