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생돌쭌

퀘렌시아(Querencia) 본문

좋은글(Good writing.いいぶんしょう)

퀘렌시아(Querencia)

고운남 2025. 10. 23. 09:31

스페인 여행시 투우장을 구경한바 있다.

투우장 한쪽에는 소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구역이 있다.

투우사와 싸우다가 지친 소는 자신이 정한 그 장소로 가서 숨을 고르며 힘을 모은다.

기운을 되찾아 계속 싸우기 위해서다. 그곳에 있으면 소는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소만 아는 그 자리를 스페인어로 퀘렌시아(Querencia)라고 부른다.

피난처, 안식처라는 뜻이다.

투우를 이해하기 위해 수백 번 넘게 투우장을 드나든 헤밍웨이는

"퀘렌시아에 있을 때 소는 말할 수 없이 강해져서 쓰러뜨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라고 썼다. 

 

퀘렌시아는 회복의 장소이다.

세상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곳,

힘들고 지쳤을 때 기운을 얻는 곳,

본연의 자기 자신에 가장 가까워지는 곳이다.

산양이나 순록이 두려움 없이 풀을 뜯는 비밀의 장소,

독수리가 마음 놓고 둥지를 트는 거처,

곤충이 비를 피하는 나뭇잎 뒷면,

땅두더쥐가 숨는 굴이 모두 그곳이다.

안전하고 평화로운 나만의 작은 영역이다.

 

명상가이신 류시화 시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명상에서는 이 퀘렌시아를 '인간 내면에 있는 성소'에 비유한다.

명상 역시 자기 안에서 퀘렌시아를 발견하려는 시도이다.

삶에 힘든 순간들이 있다.

그 순간들을 피해 호흡을 고르지 않으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거나 부정적인 감정들로 마음이 피폐해질 수 있다.

그럴 때마다 여행은 나만의 퀘렌시아였다.

여행지에 도착하는 순간 문제들을 내려놓고, 온전히 나 자신이 되었으며,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다.

그러고 나면 얼마 후 새로운 의욕을 가지고 다시 삶 속으로 뛰어들 수 있었다.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퀘렌시아를 안다.

뱀과 개구리는 체온으로 동면의 시기를 정확히 알며,

제주왕나비와 두루미도 매년 이동할 때가 되면 어디로 날아가 휴식할지를 안다.

그것은 존재계가 생명을 지속하기 위한 본능적인 부름이다.

그 휴식이 없으면 생명 활동의 원천이 바닥난다.

 

인간 역시 언제 일을 내려놓고 쉬어야 하는지 안다.

우리가 귀를 기울이면 몸이 우리에게 말해준다.

퀘렌시아가 필요한 순간임을.

나 자신으로 통하는 본연의 자리, 세상과 마주할 힘을 얻을 장소가 필요하다는 것을. 

 

장소만이 아니다.

결 좋은 목재를 구해다 책상이나 책꽂이 만드는 일에 집중하고 있으면 번뇌가 사라지고 새 기운이 솟는다.

그 자체로 자기 정화의 시간이다.

좋아하는 공간, 가슴 뛰는 일을 하는 시간, 사랑하는 이 와의 만남,

이 모두가 우리 삶에 퀘렌시아의 역할을 한다.

소음으로부터 벗어난 곳에서의 명상과 피정, 기도와 묵상의 시간,

하루 일과를 마치고 평화로운 음악이나 풀벌레 소리에 귀 기울이는 밤,

내면세계의 안식처를 발견하는 그 시간들이 모두 퀘렌시아이다.

막힌 숨을 트이게 하는 그런 순간들이 없으면 생의 에너지가 메마르고 생각이 거칠어진다. 

이런 '쉼'의 순간들이 없었다면 나 역시 건강한 삶을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누군가 말했듯이, 인생은 쉼표 없는 악보와 같기 때문에

연주자가 필요할 때마다 스스로 쉼표를 매겨 가며 연주해야만 한다.

가장 진실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퀘렌시아이다.

나아가 언제 어디서나 진실한 자신이 될 수 있다면,

싸움을 멈추고 평화로움 안에 머물 수 있다면,

이 세상 모든 곳이 퀘렌시아가 될 수 있다. 

좋은 시와 글을 종이에 베껴 적거나 소리내어 읽는 것 같은 소소한 일도 그런 역할을 한다. 

(모셔온 글)

 

나의 퀘렌시아는 낚싯대 펴놓고 찌불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



'좋은글(Good writing.いいぶんしょう)'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벗과 친구'란?  (0) 2025.10.24
애틋한 아내 사랑  (0) 2025.10.24
나의 펭귄 친구, 딘딤  (1) 2025.10.22
중요하지 않은 것  (0) 2025.10.22
함께 젓는 노  (0) 2025.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