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생돌쭌
길 본문
그 길에 내가 있었다
글 : 윤정수
나의 유년시절, 학교를 마치고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엄마는 대개 집에 안 계셨다. 들에 나가지 않았다면 장거리에 나가셨기 때문이다. 한참 엄마의 손이 필요할 아이들의 뒷수발은 늘 할머니의 몫이었고 새벽녘 잠을 자다 냉수를 찾아 대는 우리들을 챙긴 것도 엄마가 아닌 할머니였으니 한때 나는 엄마가 ‘돈만 버는 로보트’인 줄 알았다.
산으로 둘러쌓인 꼭꼭 숨어버린 마을은 버스가 다닐 것이란 기대는 꿈에도 하질 않았고 재수 좋게 만난 군용 트럭은 마을 어귀까지 고마운 발이 되어 주곤 했다.
초등학교 4학년까지는 유치한 장난도 서슴지 않았다. 안동네 아이들과 우리동네 아이들은 편이 갈라져 있었고 서로의 마을이 만나는 길목에 누가 먼저 도착하냐에 따라 수시로 주인이 바뀌었고, 가끔 기세 싸움은 옴팡지게 싸우다 보면 코피까지 터뜨리는 몸싸움으로 변하기도 했다.
그래도 마을은 사계절이 늘 아름다웠다.
겨울은 하얀 눈세상에 신이 나 있었고 집앞에 찍힌 토끼 발자국을 쫓다 보면 산 어귀쯤 토끼가 보이곤 했다. 사월의 봄은 녹음이 아름답게 꾸며지는 모습이 경이로웠고 찔레꽃을 따 먹기 위해 하굣길엔 신작로 옆의 샛길을 기웃거리기 일쑤였다. 여름 한 철 실개천 주인은 우리였고 빨갛게 익은 산딸기는 좋은 간식거리가 되어 주었다. 가을은 황금 물결이 넘실거렸고 탈곡기로 벼를 터는 모습 또한 어린 내 눈에서조차 풍요로움의 상징이었다.
유년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을 고이 간직한 채 중학교에 들어갈 즈음, 내가 사는 마을에도 개발의 조짐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면서 버스가 다니기 시작했다. 고작 하루에 세 번밖에 다니지 않는 버스였던 만치 마을 버스는 매일 진풍경이 벌어지곤 했다. 아침 통학시간의 버스가 학생들보다는 시골 아주머니들이 내다 파는 채소 보따리로 가득했고 가끔 버스 기사 아저씨가 짐은 못 실어 주겠다며 으름장을 놓았고 아주머니들은 차비에 짐 삯까지 낸 뒤에야 버스에 오를 수 있는 웃지 못할 일들이 매일 일어나다 시피 했다.
아침마다 콩나물 시루 같은 버스는 비나 눈이 오는 날에는 기사 아저씨의 월권 행위라도 되는 듯 안동네 고개를 넘기에는 길이 나쁘다는 핑계로 안 들어오기도 했으니 그럴때면 우리는 걸어서 30분이나 되는 거리를 지각하지 않으려 열심히 뜀박질을 해 대곤 했다. 하지만 웃긴것이 궂은 날씨라도 기사 아저씨에 따라 들어 오고 안 들어 오고 했으니 아저씨들이 얼마나 우리 마을을 기피했는지 짐작 할 만 했다. 무서운 이야기 하나가 떠 오른다. 우리 마을에 사는 아저씨 한분이 저녁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얼큰하게 취한 채 밤길을 걸어 오다가 길 어디쯤엔가에서 백발을 한 귀신이 자신을 쫓아 왔다는 소문이 그 다음날로 쫙 퍼져 오래도록 걸어오는 사람들의 오금을 저리게 했다. 그 소문의 진상은 그 후로 오랫동안 그 아저씨 외엔 본 사람이 없었으니 그저 술김에 헛 것을 본 것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지금은 한시간에 한대 꼴로 버스가 다니니 마을도 많이 발전했다. 간혹 친정에 들어 갈때 자동차 대신 버스를 이용하기도 하는데 앉아 있는 사람보다 빈 자리가 많을 정도로 버스는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 하긴 시골에도 집집마다 자가용이 한대쯤은 있는 세상이 되었으니 버스회사가 경영난을 호소하는 것도 당연한 것인지 모르겠다.
내 아름다운 유년과 청춘이 자라던 그 길에 때로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때로는 가슴 저미도록 슬픈 사연들이 고스란히 묻어 있음을 그대들은 아시는가.
내 젊은날의 초상은 그 길에 있었다.
이번 문인협회 파주지부에서 '길'이라는 주제로 작품 공모가 있었습니다.
부족한 솜씨나마 산문부문에 응모하였는데 우수상에 당선되었네요.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이 제게 좋은 선물을 안겨 주었습니다.
'좋은글(Good writing.いいぶんしょう)'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읽어도 안읽어도 좋은글 (0) | 2009.05.21 |
|---|---|
| "가생" 놀이 (0) | 2009.05.21 |
| 내가 얼마나 더 외로워져야 (0) | 2009.05.21 |
| 지란지교를꿈꾸며 (0) | 2009.05.21 |
| 우리나라꽃들에겐 (0) | 2009.05.2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