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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いいぶんしょう)

나는 굽없는 신발이다/문차숙

고운남 2010. 2. 19. 15:10

 

 

 나는 굽없는 신발이다/문차숙

 

그때는 뾰족 구두로 똑, 똑 소리 나게 걸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신발 굽이 낮아진다

그저 높낮이 없이 바닥이 평평하고

언제 끌고 나가도 군말 없이 따라 오는

편안한 신발이 좋다.

 

내가 콕,콕 땅을 후비며 걸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헤지게 했는지

또닥거리며 걸었을 때,

또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가슴 저리게 울렸을지

굽을 낮추면서 알겠다.

신발이 닳아 저절로 익숙해진 낮은 굽은

굽 높은 신발이 얼마나 끄덕 거리면서

흔들흔들 살아가는지 말해준다.

 

이제 나는

온들 간들 소리 없고 발자국도 남기지 않는

햐얀 고무신이고 싶다.

어쩌다 작은 발이 잠깐 다녀올 때 쏘옥 신을 수 있고

큰 발이 꺾어 신어도 이내 제자리로 돌아오는,

나는 굽이 없는 신발이다.


- 시집 『나는 굽 없는 신발이다』(2010. 문학예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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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에게 구두 특히 하이힐은 자존심이고 욕망의 상징이라고 한다. 신데렐라처럼 구두가 마치 운명이라도 바꿀 수 있는 신통한 물건인양 환상을 갖기도 한다. 아울러 성적 욕망이나 허영을 만족시키는 가면과 같은 역할도 한다. 옷은 사회적 통념과 다른 사람의 이목에 신경 쓰이지만 신발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상황에 있기 때문에 욕망을 과감하게 표출하는 가장 안전한 형태라는 것이다.

 

 과거 필리핀의 ‘이멜다’ 여사는 무려 3천 켤레의 구두를 모았다는데 얼마 전 케이블TV를 보고서 우리나라에도 적지 않은 슈어홀릭이 있다는 걸 알았다. 높은 굽의 우뚝 선 당당한 모습이 성적 느낌으로도 근사해 뵈기는 하지만 자꾸만 높아가는 굽의 높이에서 뇌쇄를 넘어 살기마저 느껴진다. 그리고 건강에도 나쁜 영향을 주는 건 물론이고 비활동적이고 왠지 문턱이 높아 보인다.

 

 굽 없는 신발을 예찬하며 스스로 ‘나는 굽 없는 신발이다’라고 자처한 문차숙 시인은 모든 사람들과 ‘비오는 오후나, 눈내리는 밤에도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즉 ‘지란지교’를 꿈꾸는 건 아닐까. 60년대 은막을 주름잡은 ‘오드리햅번’의 플랫슈즈에서 느꼈던 다정함과 편안함을 잃지 않으면서 모종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일을 도모하려는 사람의 결의가 읽힌다.

 

 굽 없는 신발의 표방은 많이 돌아다니겠다는 뜻이고, 누가 부르면 어디든 달려가겠다는 태세이며, 시킬 일이 있으면 마음 놓고 부려먹어도 군말 않겠다는 의사표시일런지 모르겠다. 기숙사 사감이나 여전도사 같은 이미지를 벗어나 굽 없고 말랑말랑한 ‘고무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놀라운 힘과 또 다른 당당한 매력이 감지된다.

 

 

ACT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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