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칼-이은봉-
바람의 칼
-이은봉-
바람은 처음 눈에 잘 띄지 않았다 흙먼지를 거느리고 불어올 때나 바람의 모습은 겨우 눈에 띄었다
보통은 흙먼지보다 안개더미를 몰고 다니는 것이 바람이었다
안개더미를 몰고 다니는 바람을 맞으면 갈 길이 늘 몽롱했다
안개더미를 몰고 다니는 것은 바람이 땅에서 살 때였다
그때가 문제이기는 했다 사람들은 바람의 정체를 잘 알지 못해 자꾸만 불안해했다
바람이 주로 사는 곳은 하늘이었다 하늘에서 살 때는 천천히 뭉게구름을 밀고 다니며 유유자적했다
그렇게 한가하게 사는 바람이 나는 좋았다 한때는 그것이 바람의 본 모습이라고 믿었다
창틈으로 올려다 보이는 하늘을 사는 바람은 전혀 욕심이 없어보였다 청정하고 무구한 바람……
그때는 몰랐다 바람이 제 가슴에 엄청난 짐승을 키우고 있는 줄을
느닷없이 땅에 내려온 바람이 울타리를 부수고 뛰쳐나온 미친 비를 휘몰아치며 꼬라지를 떨어대기 시작하면 도무지 어쩔 줄을 몰랐다
양손에 칼을 든 바람이 폭우 속에서 개지랄을 떨기 시작하면 누군가는 꼼짝없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나뒹굴어야 했다
바람의 칼…… 그의 칼을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 날에는 하루의 日辰만을, 해와 별의 운세만을 탓할 수 없었다
축축이 물에 젖은 채 두터운 이불을 뒤집어쓰고 깊은 우물 속으로 가라앉는 수밖에 없었다 가라앉아 발가락이나 꼼지락거리며 날이 바뀐 아침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